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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 단문 두 개...많이 짧다. 두 번째 단문은 당연히 원작 기준이니 카이바가 결투의 의식을 보지 못한 걸 전제로 쓴 부분이 있는데, 애니에서는 봤었기 때문에 쓰면서 상당히 기분이 이상했다.....봤다면 카이바는 신극과 많이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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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초대하지. 차원 영역 듀얼에.

아이가미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이 단지 단순한 감에 의존한 결과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묘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거리를 두고 경계를 했어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라는 감각이 있었다. 그래도 아니겠지, 라는 막연한 바람과 알량하기 짝이 없는 소망. 널 의심하고 싶진 않았어.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으면 풍경이 변해가고 있다. 눈앞의 채도 높은 금색 안구가 담아내는 세계는 생기도, 색도 없어서, 그 자체로도 텅 빈 상자 안처럼 여겨졌다.

 

파라오의 부활을 막는 게 목적이라고 말하는 아이가미의 얼굴에는 선명한 적의가 떠올라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넌 방해야. 덧붙여지는 문장은 간결했고, 무거웠으며, 그만큼 쉽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유를 듣고 나니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발치로 쌓였던 이시즈의 말을 떠올려본다. 당신의 기원으로 파라오는 가까운 현세에 부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간격 없이 몇 음절들이 따라붙었다. 가능성, 이지만.

미래를 갈망하는 인간 앞에 언젠가라는 막연한 단어란 단지 허울 좋은 수식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보다 확실한 목표와 소망이 아이가미에겐 있었고, 그건 단지 어중간한 언젠가라는 말 따위로 물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갈망과 소망, 열망과 희망이 뒤섞인 끝에 도달한 집착은 타인의 생명조차 망설임 없이 짓밟았다. 파라오의 부활로 그들의 미래가 사라진다면, 그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면, 아이가미의 주장은 어느 정도 옳다고 할 수 있었는데도, 요루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천년 퍼즐에 더 이상 파라오의 영혼은 존재하지 않아.”


즉 현세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건 추측도 예상도 아닌 모두가 이뤄낸 길 끝에 찾아온 온당하고도 합당한 결말이었다. 아무리 퍼즐을 수만 번 복원한들 파라오가 이 세계에 현신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해도 파라오는 부활하지 않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문장이 혀끝에 머무르면 입을 잠시 닫는다. 그 지리멸렬한 침묵 사이에서 아이가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부정당한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종국에는 망가뜨리기로 결심한 아이의 얼굴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 말을 믿을 거 같아?”

“넌 정말 어린아이 같네, 아이가미.”

 
순순히 망가뜨릴 의도에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카이바를 저 차원으로 보내버리려 했단 사실을 듣고, 유우기를 해치려는 의도를 알고, 죠노우치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버린 걸 목격했음에도, 유키미 요루는 아이가미를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네가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단지 그런 생각을 한다. 너와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으면 좋겠네. 바로 어제 들었던 그 문장이 진심이었으면 했다. 자신들에게 보여줬던 모든 행동들에 조금이나마 진심이 됐었다면. 이제 와 무의미한 단순하기 짝이 없는 가능성을 생각했다.

네가 정말 친구가 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금색 안구의 가장자리가 부자연스럽게 깎인다. 맞닿았던 시선은 곧 어긋났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혼다가 수리해준 죠노우치의 듀얼디스크는 깨끗했다. 그리고 아마 수리 후의 첫 사용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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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녀석의 힘이라면 큐브를 열 수 있겠지. 카이바는 그렇게 말했다. 그건 질문도, 추측도 아닌 강압과 강요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무슨 답을 돌려줘야 할지 말을 골라내는 그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생겼다. 올려다보는 시선과 내려다보는 시선 사이에는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간극이 존재했고, 닿으려면 딱 그 정도의 거리가 더 필요했다. 대답한다면, 그 문장은 간극을 메울 만큼 닿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온전히 닿을 수 있을까. 상대의 마음에도 도달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큐브를 쥐면 겉면에 새겨진 문양의 감촉이 피부 위로 느껴졌다. 아이가미가 카드 케이스라고 소개했던 물건은 사실 큐브였고, 그 안에는 카드가 아니라 이제 금속 조각이 들어있었다. 들어있다, 고 카이바는 말했다. 몇 개월 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면서 같이 가라앉았을 천년 퍼즐 조각이 왜 이곳에 존재하는지는 이미 아이가미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그래서 더 대답하는 게 망설여졌다. 열지 말지는 온전히 이쪽에게 달려있었고, 거짓말을 해도 그 여부를 카이바는 알 수 없음에도.

 

난 안 열거야.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스스로가 연기에 능숙하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지만 어차피 전부 들통 나도 문제될 건 없었다. 그 이유를 카이바는 알지 못하는데다가 명확한 근거 없는 확신이란 단지 추측에 불과하다. 불확실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오컬트보다, 논증과 해법을 통해 답을 도출해내는 신기술과 과학을 사랑하는 카이바가 그런 애매한 추측을 들이밀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무엇보다… …, 이게 사실일지 아닐지, 스스로조차 거기서 눈을 돌리고 있다.

 

 

“그 잘난 힘으로도 못하는 게 있긴 했나보지.”

 

“내 힘이 만능인줄 알아? 다시 말해두겠는데, …더 이상 천년 퍼즐에 아템의 영혼은 없어.”

 

 

그 때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갔다. 아템이 본래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간 시점에서 그동안의 여정은 끝났다. 만약 카이바가 그 자리에서 모든 걸 지켜봤다면, 이야기의 종막을 마주했다면, 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까. 카이바는 그 결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가끔 요루는 그게 궁금해졌다. 카이바 세토라는 남자가 그 결말을 인정하고, 자신의 인생에서 패배를 받아들여 거가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사실은 너도 아템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냐고 말했던 카이바의 음성을 기억한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날부터 줄곧, 유키미 요루는 괴롭진 않았지만 조금정도는 슬펐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낸 상실감과 공백은 고작 몇 개월만으로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처음으로 실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구나 있어야할 곳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스스로 정하는 것 이전의 문제였다. 차라리 선택지가 있는 문제였다면 조금정도는 편했을 텐데. 입술 밖으로 이름을 떨어뜨리는 것조차도 가끔 망설여질 때면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스스로에 비실비실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건 조금 전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선가 침묵이 공기 안쪽으로 침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심해의 것과 닮아있다. 카이바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지만 문장을 골라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닿지 않을 걸 알아서, 아까 보았던 간극이 여전히 남아있는 걸 확인하고 큐브를 내려다보았다. 이 큐브는 보고 있던 세계의 풍경을 한 순간에 뒤바꿨다. 그렇다면 그건 곧 세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요루는 큐브를 손끝으로 가볍게 돌렸다. 표면과 피부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 세계가 흔들리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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