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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번째+36번째 드림 전력 주제 '돌아가다'/'내 이름을 불러줘'로 참가.

 

유희왕 DM/어둠의 유우기 드림

written by. kaseyana  


* 어둠의 유우기의 본명 언급이 있습니다.

* 왕의 기억편~결투의 의식 사이의 이야기.



파도 냄새가 났다.

처음으로 배에서 맞는 밤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민소매에 반바지인 걸 염려한 죠노우치가 진작 본인의 자켓을 거의 덮어씌우다시피 건네줬지만 그 뒤에 곧장 재채기를 하는 걸 보자마자 금방이라도 돌려주고 싶어졌다. 이 죠노우치 님은 끄떡없다고! 그 말에 콧물이 딸려 나왔던 걸 기억한다. 허세에 경박한 말들만 잔뜩 늘어놓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그게 상대가 자신을 걱정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바닷바람이 잔뜩 묻은 베이지색 자켓을 조금 더 여미면 이상하게도 체온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서늘해질 테니 선실로 들어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던 마리크는 일행과 함께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배틀 시티가 끝난 후 재회한 마리크는 퍽 친절하게 굴어서, 여전히 자신들에게 죄책감이 남아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쩌면 잊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마리크의 몫이지만 후자라면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요루는 잊을 수 없었다. 설령 모든 듀얼리스트들에게 동경과 환상으로만 남을 배틀 시티가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로 개최된 거라 하더라도, 대회 도중 수많은 희생이 뒤따랐다하더라도, 종국에 와서 그건 자신이 선택해 걸어온 길이므로.

 

배 아래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마저도 들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자마자 문득 괴로워졌다.

 


있잖아, 요루.”

 


뒤를 돌아보면 안즈가 있었다. 안즈. 그렇게 발음하자 얼굴이 조금 복잡하게 변했다. 처음부터 가라앉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 형태만 바뀐 것에 가깝다. 기억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원래 세계로 돌아온 후로부터 안즈는 줄곧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루는 손끝으로 스스로의 얼굴을 더듬었다. 하지만 손으로는 스스로의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어쩌면 이쪽도 마찬가지일지도 몰라서, 그것만으로도 참담한 기분이 되어버리고 만다.

밤공기 속에서 음성이 머무르는 소리를 듣는다. 유우기가 불러. 문장이 파도 소리에 묻혔다가 귓가로 쓸려 왔다.

 

 


그냥 유우기라고 하면 어느 쪽의 유우기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사실 이제 유우기라는 이름이 두 명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어서 어느 의미로 받아들여야할지 애매해진다. 노크를 하면 들어오라는 소리가 문 너머로 넘어왔다. 요루는 카드 수십 장이 책상 위에 엉망으로 펼쳐져 있는 걸 보고서야 한 박자 늦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유우기.

 


와줬구나. 좋은 밤이야, 요루.”

안즈가, ‘유우기가 날 불렀다고 해서.”

 


무슨 뜻인지 유우기도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난감한 미소가 한순간 머물렀다가 흐려지는 과정은 사진을 찍는 과정처럼 섬세했고, 그만큼 시선 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요루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유우기는 언제까지고 유약하고 상냥해서 이런 웃음을 지을 거라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데, 이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한 미소였다.

많은 것들이 변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일 것이다. 유우기를 보고 있으면 그 흔적과 시간들이 유독 선명하게 와 닿았다.

 


내가 아니라, 또 하나의 내가 요루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영혼이 뒤바뀌었다. 안녕. 또 하나의 유우기는 웃고 있었다. 아니, 이제 또 하나의 유우기라고 하면 안되겠지만… …. 거기서 요루는 무슨 대답을 돌려줘야할지 망설여졌다. 안녕. 그 뒷말을 이어붙이는 게 이상하게도 버거웠다. 그 인사는 마치 너무 일찍 떠나보내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덱 구성해야 하지 않아? 너무 눈에 띄게 화제를 돌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유우기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아. 짧은 대답이 문장 뒤의 수많은 공백을 채우면서 덧붙여진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서늘한 밤공기와 희미한 물결 소리, 백색의 조명 아래서 목소리가 뒤섞이고 있다.

 


네게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기억해? 유우기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그 말을 잊은 적이 없었다. 의아한 낯빛의 얼굴이 안구 위로 또렷하게 반사된다.

 


네 말대로 나는 나쁜 왕도, 좋은 왕도 아니었던 거 같아.”

 


백성을 위해서였지만 자신을 모두 내버린 왕은 좋은 왕이라기엔 어폐가 있지.

네가 나쁜 왕이었는지, 좋은 왕이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어. 테이블 너머에서 그렇게 말하던 단정한 음색을 기억한다. 불확실한 과거와 불완전한 기억은 정체를 알았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우기는 배틀 시티에서 스스로가 왕이었다는 걸 안 이후로 끊임없는 고민에 시달렸다. 완전한 기억을 되찾게 되는 순간 마주할 현실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스스로가 좋은 왕이었다는 증거도, 확신도, 하다못해 실마리조차 없다. 두렵진 않았지만, 조금정도는 괴로웠다.

적어도 넌 좋은 왕이 되고자하는 왕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말은 유우기의 마음을 끌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듯한 감각은 어떤 문장을 가져와도 표현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덧붙여진 말은 작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멎을 리 없는 소음과 꺼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유우기는 그 말들만을 기억했다.


영원히. 감히 그 세 음절을 붙일 수도 있을 것처럼.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던 최선의 일은 그것뿐이었어. 그러니까, 그건 좋은 왕이 되고 싶은 내딛음이었어.”

 


네 말대로 나는 좋은 왕이 되고자 노력하는 파라오였던 거야. 기억의 세계에서 잃어버렸던 수많은 것들과 마주하며 유우기는 알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은 잘못 되지 않았던 거라고. 스스로의 목숨과 세계를 맞바꾼 행위는 빈말로나마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건 틀렸다고 할 순 없었다. 그 흔한 후회조차 들지 않았으므로.

천천히 팔을 들어 손을 맞잡으면 체온이 손끝부터 달라붙는다. 어째선지 그 온도는 온기보다는 열기에 가깝게 느껴졌고, 꼭 델 것처럼 여겨졌다.

 

있잖아. 마치 가까이서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이 정적 위로 쌓아올려졌다. 손은 여전히 이어져있었다. 요루는 잠시 손등에 머물렀던 시선을 떼고 보라색 안구를 들여다보듯이 마주했다. 그건 아까 해가 완전히 지기 전 보았던 하늘의 색과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어서, 이 안 쪽에도 그와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을지 조금은 궁금해져버린다.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을래?”


 

모든 게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 중에는 유우기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었다. 요루는 그제야 자신이 이 세계로 돌아온 뒤부터 유우기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그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누구보다 이름을 간절히 찾길 바랐던 주제에, 과거에 대해 잘난 듯이 떠들어댔던 주제에, 정작 스스로의 감정 확신이 없던 쪽은 본인이었다. 이름을 불러버린다면 돌아가지 말아줘, 그렇게 토해내 버릴 것만 같아서.

입을 열면, 문장 대신 호흡들이 쏟아져 나왔다. 올라오려던 음성이 목에 걸려서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수 없이 많은 감정들과 갈 곳을 잃어버린 언어들. 방황하는 내 음성

.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낀다. 유우기는 여전히 손을 놓지 않았다.

 

아템.


처음으로 잡아본 손은, 생각보다 체온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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