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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토랑 요루로 꼭 보고싶은 장면이 있어서(마지막 장면) 써본 글.

생각보다 많이 길어져버렸다...한컴 기준 10쪽이라 여태 연성 중 제일 긴 듯. 시점은 미래편, 감마와 첫 대면 직후.

 

하야토는 상냥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 서툴고, 호의를 주는 것도 받는 것도 극도로 서툰데다 아예 손조차 대지 않으려는 경계심 많은 타입이라고 생각해서....물론 후에 성장은 했겠지만. 아마 그래서 요루의 행동에 의문을 가지면서 그 상냥함과 호의들을 좀 꼬아서 받아들였을 거 같다. 이 글은 그동안 지녀왔던 의문들과 애매한 감정들이 전부 해소된 이야기...둘의 중요한 서사라서 꼭 써보고 싶었다. 이걸 기점으로 하야토가 요루에게 가진 감정의 종류가 변한 거라...감정은 천천히 발전하면서 언젠가 자각하겠지. 글은 꼭 하야토의 시점으로 끝내고 싶었다. 하야토 좋아해...

 

여담으로 요루가 저 질문을 한 의도는 어떠한 대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멸망하지 않은 세계의 대답을 들어보고 싶어서에 가깝다. 다르다고 한 대상은 그 전에 언급됐던 종세의 유우가 맞음. 걔는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한 애니까.

 

진심의 거리는 단 한 마디의 문장과 한 순간의 표정만으로도 좁힐 수 있는 것.

 

읽으시는 분들은 장르→장르 트립 요소에 주의해주세요.

 

 

진심의 거리

w. kaseyana

 

 

미안하다.

놀라울 정도로 기가 죽어있는 음성은 그대로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가, 네모나게 설계된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런 착각이 들 정도로 지나치게 선명한 목소리였다. 꼭 중대한 사죄라도 받는 기분이 들어서 기묘한 감상이 되어버리면 상대는 여전히 애매한 눈으로 시선을 피했다. 문득 색이 연한 은발 위로 백색의 조명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릴 것처럼 쏟아지는 광경을 동화 속 한 장면 마냥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10년이라는 간극을 간단히 뛰어넘어 도착한 이 세계는 동화처럼 한없이 다정하지도, 해피엔딩 따위가 전제되어있지도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문장을 골라내는 사이 정적이 공기 안 쪽으로 침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꼭 심해의 것과 닮아있어서, 수많은 정적이 가라앉은 끝엔 숨을 못 쉬게 될지도 몰랐다. 단지 입을 여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물거품이 터져 나오고 네모나게 잘린 공간은 소음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대로 나갈 거면 나가고, 아니면 이 쪽으로 와서 앉아.”

 

 

나가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은 평소 고쿠데라 하야토의 태도와 분명한 거리가 존재해서 잠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망설이게 된다. 여기 앉아. 하얀 붕대가 두어 번 감긴 팔로 간신히 침대 근처의 철제 의자를 끌어당기려고 하면 그제야 고쿠데라는 단번에 거리를 좁히면서 멋대로 의자를 낚아챘다. 상처 덧나려고 작정했냐? 곧바로 조금 어이가 없어져 튀어나오려던 말은 결국 음성이 되지 못한다. 자기도 다친 주제에.

이야기에는 딱히 재주가 없다. 하다못해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에도, 화제를 늘어놓는 것도 특기가 아니었다. 저쪽에서는 질릴 정도로 자신이 아는 거라면 전부 말해줄 것처럼 굴었던 여자아이가 있어서 실감하지 못했던 사실인데, 막상 자신 이상으로 교류에 서툴기 짝이 없는 인물과 마주해보니 스스로의 한계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어찌됐든 이런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먼저 꺼내놓는 행위는 적어도 야마모토나 리본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고쿠데라. 글자를 하나씩 삼키듯 온전한 발음으로 부르면 떨어져있던 시선 끝이 맞물렸다.

 

 

.”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일그러진 얼굴과는 다르게 의외로 선뜻 부정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적어도 이미 말했잖아, 같은 가시 돋친 대꾸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리어 그 사실에 아연한 기분이 되어버리는 건 이쪽이다.

 

. 짧은 호흡이 입술 밖으로 굴러 떨어지면 손끝으로 더듬어가듯 문장들이 어설프게나마 형태를 갖췄다. 넌 나한테 조바심 내지 말라고 했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돌연 10년 후의 간극이 존재하는 낯선 세계로 떨어졌을 때부터 줄곧 안고 있던 불안감과 막연한 두려움은 얕은 경험으로 이루어진 자신감만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쿠데라는 눈앞의 여자아이가 망설임 없이 자기 대신 공격을 받고, 건넨 말을 듣고서야, 스스로가 평소보다 훨씬 평정심을 잃었다는 걸 자각했다. 자신의 실책이 타인을 다치게 만들었다는 것까지도. 그건 처음 느껴보는 불편한 감각이었다.

그건 사실이었어. 오른팔이라는 위치로서 누구보다 잘해내야 된다는 사명감과 거기서 비롯된 조바심이 오히려 오른팔 실격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을 때의 기분이란 그 어떠한 문장을 끌어와도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을 거 같았다. 단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에는 어떠한 책망이나 원망도 머물러있지 않아서 불현 듯 괴로워진다.

 

 

 

낯선 곳에 떨어졌을 때의 기분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타인의 기분을 감히 이해한다는 말조차도 오만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순간의 감각은 아직 이 안쪽에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내벽을 타고 기어오르던 불안감과 스스로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형편없는 두려움. 줄곧 지켜보았던 세계의 풍경이 한순간에 뒤집혔을 때의 충격은 어떤 의미로 세계가 발치로 모조리 부서져 내린 후보다 더한 상실감을 남겼다.

 

 

그러니까, 난 괜찮으니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거기서 의도적으로 말을 끊는다. 올라오려던 수많은 단어들이 안쪽에 걸린 탓에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끊긴 문장 뒤로 고쿠데라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지만 이 문장은 그저 미완성인 채 남을 것이다. 그게 응당 맞는 거라고 한다면, 회복력이 우수한 내가 모든 걸 감당하는 게 맞다고 한다면, 츠나요시는 분명 또 다시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는 화를 낼 테니까.

그런 힘이라면 필요 없어! 도리어 본인이 더 괴로운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던 걸 기억하고 있다.

 

 

 

아니, 그냥. 웬만해서 단독 행동은 삼가는 게 좋아. 팀플레이 때는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진다고.”

뭐야, 그거. 경험이냐?”

 

 

단지 입 끝만 올려 웃는 표정을 이끌어내 본다. 하지만 자신만으로는 스스로의 표정을 알 수 없다. 설령 웃고 있다고 해도 실패를 거친 어설픔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셈이지? 자신의 일인데도 마치 타인의 일인마냥 애매하게 톤을 올린 질문으로 답을 대신하자 고쿠데라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변했다가, 이윽고 의아함의 형태로 고정됐다.

 

 

너도 단독 행동을 한 적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 무슨 소리야. 내 얘기 아니거든?”

 

 

곧바로 질색하는 모습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진심마저 느껴져서 순간 고쿠데라는 재미를 넘어 조금 유쾌함까지 느꼈다. 표정의 순환이 단조로울 것만 같던 얼굴이 사실은 매 순간순간마다 감정이 여과 없이 반영된다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다. 고쿠데라 하야토가 처음 보았던 유키미 요루는 서늘한 인상에, 꼭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기묘한 색채를 가지고 있었기에. 낯선 곳에 뚝 떨어진 여자아이는 언제까지고 그런 표정이 빈곤한 얼굴과, 타인을 밀어내려는 듯한 새카만 눈으로 자신들을 대할 것처럼 보였다.

 

 

있어, 단독 행동으로 우리 팀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녀석이. 난 걔 싫어하지만.”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싫어한다고 보기엔 헤아릴 수 없는 감정들이 그 안에 머물러 있다. 감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사정과 감정들이 문장 아래 앙금처럼 쌓인 채 한없이 침잠한다. ? 라고 간단히 물어보고 싶어도 아직 고쿠데라 하야토는 이 사이에 놓인 거리가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손을 뻗으면 손쉽게 팔을 붙잡을 수 있는 이 간격이, 타인의 마음에 금세 도달할 수 있는 거리와 동일한지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고쿠요 사건 이후 자신에 대한 걸 털어놨었어도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들을 동떨어진 세계의 누군가로 취급하고 있다고 여겼다. 타인을 믿는 것과 동등한 시선으로 상대를 마주하는 게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랬기에… …, 감마와의 싸움에서 대신 부상을 입자 조금정도는 혼란스러웠다. 유키미 요루에게 있어서 자신들이란 아주 약간,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게 된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므로. 언젠가 야마모토 타케시가 웃으면서 했던 말을 상기한다. 요루는 전보다 우리를 더 좋아하는 거 같지?

 

인간관계가 그리 간단해질 수 없다는 걸 안다. 존경해마지 않는 십대 째와 야마모토 타케시가 요루의 태도로 종종 아쉬워 할 때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몇 시간에 걸쳐 나열했을 때는 놀랐고, 이제와선 혼란스러운 것이다. 이 여자아이에게 있어서 자신이 그럴 정도의 존재였는지,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내던져도 좋을 상대였는지가.

어째서, . 상대의 진심에 닿기 위한 가장 연약하고도 간단한 언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다.

 

 

그래도 걔보단 네가 나아. 여러모로. , 우선 머리는 네가 더 좋네.”

 

 

별로 칭찬으로 들리진 않는데. 그렇게 가볍게 대꾸하면 진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애매한 기분이었다. 분명 어차피 언젠가는 떠나갈 존재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테다. 그러니 10년 후의 자신이 이 시대에 아직 존재한다는 걸 알았을 때 발밑을 모조리 상실한 것만 같은 얼굴로 말을 잃은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세계의 존재로만 인식하고 있을, 완전한 타인 대 타인의 관계. 딱 그 정도의 관계일 거라고 여기는 데에는 그 어떠한 의문도 불만도 가지지 않았던 걸 기억한다.

 

 

돌아가고 싶냐?”

뭐가?”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문득 자신의 행동을 저쪽의 것과 겹쳐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주 조금 정도는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셈으로는 환산이 불가능한 시간동안, 얼마만큼의 것들을 자신의 세계의 것들과 비교해보고 겹쳐본 끝에 어느 정도의 감정을 느꼈을까. 답이 정해진 형편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건 왜? 짧은 대답이 문장 뒤의 수많은 공백을 채우면서 덧붙여졌다. 거기엔 어떠한 악의도 경계도 존재하지 않아서, 혀 근처까지 기어 올라온 언어들이 아주 잠시 동안 완전히 형태를 잃었다. 단지 눈을 가만히 마주쳐오고, 숨을 토해내는 풍경을 눈 안쪽에 담아낸다.

 

 

딱히 널 걔랑 겹쳐보는 건 아냐.”

 

 

다른 존재임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작 공통점 한두 개로 상대에게 누군가를 덧씌워보는 무례한 행위를 저지를 만큼 절박하다기엔 이미 요루는 최소 10년간은 돌아갈 수도 없다는 걸 깨달아버린 뒤였다. 그래도, 미안. 다소 힘 빠진 음성이 침대 시트 위로 쏟아지는 것 같은 착각을 받는다. 이미 한 번 발치로 부서져 내린 후의 세계에서 수많은 것을 잃은 인간과, 가늠할 수도 없는 무수한 것들을 얻을 상대를 겹쳐본다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기만이다.

그래도 아주 약간은, 희미한 흔적정도는 더듬어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토록 이해조차 불가능했고, 결국에는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했던 소년을, 이제 와서.

 

물어볼게 있어. 잠시 동안 소리 내는 걸 잊었던 문장은 천천히 끝부터 무너져 내렸다. 그건 꼭 오래 전 세계가 스러져가던 소리와 닮아있다. 단지 고쿠데라의 음성은 언제라도 언어들을 만들어내는 걸 반복할 것이다. 호흡 속에서 소곤거리고 타인의 진심에 닿기 위한 변하지 않는 것들을. 그건 분명 멸망과는 거리가 존재한다.

. 거기서 호흡이 쉼표를 찍었다.

 

 

 

왜 날 구해줬지?”

질문이 조금 이상하지 않아?”

 

 

그게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던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좀 더 근본적이고, 근간에 가까운 무언가. 고쿠데라가 진심을 나열하는 데에 재주가 없고 드러내는 것조차 서툴다는 건 알고 있다. 방법을 모르는 건지, 경험이 부족한지는 요루로서 알 수 없다. 그런 것들이 아직까지는 아주 많았다. 단지 한 바퀴 빙 돌아간 끝에야 비로소 의미를 찾으려는 화법은 어설프기 짝이 없어서, 차라리 두서없는 말이라 해도 어떻게든 엮어줬으면 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결코 모르는 것들이 있었다.

그냥 하고 싶은 말 해도 돼. 한숨처럼 늘어진 말이 덧붙여지면 녹색 안구가 다물릴 것처럼 가느다랗게 깎인다.

 

 

, 네가 우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하는 줄 알았다.”

언젠간 돌아갈 거라서?”

 

 

대답 대신 고개가 천천히 흔들린다. 아래에서 위로 두어 번 정도 반복되는 흔들림은 긍정의 의미다. 약간의 간격 뒤에야 다시 벌어진 입술이 문장을 떨어트렸다.

 

 

하지만 난 딱히 거기에 아무 생각도 없었어. 십대 째와 야마모토 녀석은 조금 달랐던 거 같지만. 어쨌든 넌 언젠가는 돌아갈 녀석이었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사실 줄곧 의아한 부분들이 어딘가 군데군데 물자국처럼 남아있었다. 완전한 타인에게, 과연 어느 정도의 호의와 얼마만큼의 상냥함을 주저 없이 건넬 수 있을까. 헤아리는 게 불가능한 한계까지 스스로의 진심을 드러내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결과적으로는 타인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거라 여기면서도 수많은 감정들이 머무는 얼굴을 볼 때 마다 이 사이에 놓인 거리를 끊임없이 가늠하게 되었다. 링 쟁탈전의 훈련에서 도시락을 갖다 준 것과 그 때의 모든 말들도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면 결국 걱정에 지나지 않았기에. 종국에는 타인으로서 막을 내릴 관계에 진심과 온전한 호의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한없이 이상하고 난해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난 네가 정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넌 그동안

 

 

그동안. 거기서 잠시 호흡을 멈춘다. 생각을 음성으로 교환하는 행위조차 이토록 어렵다. 표정을 알기 쉬운 타입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적어도 지금은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문장을 골라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할 말이 없는 건지는 모른다. 아직,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랬구나. 이제껏 이쪽에 닿아있던 눈길이 천천히 침대 시트 위의 손끝으로 옮겨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다. 감상이라기엔 지나치게 간결하고 대답으로는 군데군데 부족한 부분들이 남아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이 열렸다가, 다물리는 광경이 어째서인지 시선 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뭔가 생각하고 있다는 건 알았는데.”

? 너 내가 이런 생각 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냐?”

 

 

고개를 저으면 감마의 박스병기에 맞은 머리가 옅게 울려서 요루는 눈을 반쯤 찌푸려야했다. 시야가 불투명하게 흐려졌다가 이윽고 느리게 제자리를 찾는다. 아니, 그건 아니고.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입을 열어 대답을 대신하면 고쿠데라는 여전히 복잡한 표정이었다. 맨 살보다 붕대의 면적이 훨씬 많아 보이는 엉망인 얼굴에서도 선명한 녹색 안구는 백색의 조명 아래서 변함없는 채도를 간직하고 있다.

 

 

그냥 느낌이었어. 네가 날 대할 때 뭔가 어색해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하는 걸 어색해 한다기 보단 그저 돌아오는 반응이 부자연스러운 것에 가까웠다. 말을 걸면 대부분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들렸고, 그럴 때면 꼭 애매한 표정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어서 단지 이름을 불러보는 것 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쿠데라. 시선 사이에 놓인 높이만큼의 간극을 음성으로 전부 메우려는 것처럼 온전하기 짝이 없는 발음으로, 그렇게.

고쿠데라의 말에서 굳이 정정할 부분을 찾진 못했다. 언젠가 돌아가는 걸로 영원한 끝이 전제된 관계란 그만큼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금세 파열해버릴 연약한 것이다.

 

 

이곳에 왔을 때 얼마간은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간신히 거기까지 말하면 문득 한숨처럼 웃고 싶어진다. 아니, 어쩌면 그냥 한숨을 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결국에는 어느 쪽도 해내지 못했다. 손끝으로 더듬으면 단숨에 떠올릴 기억인데도 입 밖으로 꺼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기력을 요구했다.

언젠가 단조로운 어조로 나열했던 리본의 음성을 기억하고 있다. 넌 그 녀석들의 진심을 받아들인 후, 돌아간 스스로를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뿐이겠지. 리본의 말은 늘 타인의 안 쪽을 정확히 더듬어내는 구석이 있어서 체한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츠나요시는 자신들의 진심이 조금도 닿지 못한 것 같다고 우울해했다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어울리지도 않게 쌓아올렸던 어설픈 경계심과, 스스로와 타인을 격리해내는 선은 모두 그 순간에 끝났다. 타인의 온기, 다정함, 상냥함 따위의 한없이 연약하고 무른 것들은 그런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단지 난 헤어진 후의 상실감이 무서웠던 거야. 이제는 꽤 간단히 인정할 수 있게 된 문장을 바닥으로 조금씩 내려놓는다. 전제되어있던 종막과 거기서 비롯될 상실감. 그걸 견뎌낼 자신이 당시의 여자아이에겐 아직 없었다. 무의미한 관계라고 단정 지었던 결론은 사실 스스로의 나약함을 그럴듯하게 꾸며낸 것에 불과했으므로.

 

여전히 이쪽을 향해있는 안구를 들여다보듯이 마주한다. 녹색은 생명의 색. 종말과는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먼 곳에 위치한 채 채색되어 있는 것. 불현듯 이 안쪽에는 어떤 무수한 생명들이 숨 쉬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지. 그러면 대답 대신 시선만이 달라붙었다.

 

 

난 이제 내가 있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어. 그게 언젠가 끝나버릴 거라고 해도.”

 

 

그 한 마디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머뭇거림도 없어서 도리어 이 쪽이 할 말을 고르게 되어버릴 것 같다. 어느 날 이 여자아이가 자신에 대한 것들을 창밖의 풍경이 바뀔 동안 털어놓았을 때, 그게 그 정도로 간단한 결정이 아닌 건 알고 있었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각오와 믿음이 동반되어야만 가능한 행동을 이 애는 그동안의 어떤 모습보다 가장 가벼운 얼굴로 해냈다. 언제나 각오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금세 불꽃을 피워낸 거라는 리본의 말을 선명히 기억한다. 저 말 역시 그러한 성질의 각오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고쿠데라는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가 얼마나 괴로움과 갈등의 연속이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냐. 수많은 정적과 공백이 한발 앞서 채워진 세 음절은 유독 발음하기 버겁게 느껴진다. 고쿠데라는 거기에 어떤 대답이 어울릴지 고민하는 대신 그저 긍정하는 쪽을 택했다. 타인에게 다정한 공감을 건네고 상냥한 위로로 진심을 전하는 건 별로 특기가 아니었기에. 단지 그 세 음절 안에 계량조차 불가능한 감정을 쏟아 붓는다.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단정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 귓가에 떨어지면 여전히 마주한 눈으로 천천히 대답했다. 뭔데.

 

 

만약에, 네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고 하자.”

전제가 너무 포괄적인데.”

그러면 츠나가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러고서는 간격 없이 짤막한 문장이 덧붙여졌다. 미안. 이 전제가 자신에게 딱히 좋지 않은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과다. 이미 이 세계에서 그 전제는 더 이상 가정이 아니었다. 이곳으로 오자마자 눈앞에서 마주했던 비참한 진실을 전제로나마 되살리는 건 어떤 의미로든 기분 나쁠 수밖에 없는 전개이기에. 하지만 고쿠데라는 그 말에 화를 내는 것보다 질문을 듣는 쪽을 고르기로 했다. 됐어.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랍도록 차분한 목소리는 적막만으로 이루어져가던 공간에서 유독 분명하게 들렸다.

 

 

그런데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수많은 타인을 죽이는 것밖에 없어.”

 

 

너라면 어쩔 거야?

마치 가까이서 속삭이는 것 같은 음성이 정적 위로 쌓아올려졌다. 손끝으로 조금만 건드린다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감각이 온전한 문장을 단지 가만히 바라본다.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였다. 언젠가 세계가 모조리 발치로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보았다던 여자아이는, 그로 인해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려 수많은 인간을 죽인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그 남자가 사실 소중한 사람들을 되살리기 위해 세계를 부수었다는 것도. 무슨 의도로, 어째서 그 상황을 대입시켜 질문하는 건지 알 수는 없다. 그저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색의 저 안구가, 어쩌면 맞닿는 시선 안쪽까지 물들일지도 몰랐다.

대답에 이르기까지 망설임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전에 고쿠데라는 요루의 얼굴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음성이 공기 아래로 가라앉는 순간 속에서 한순간 머물렀다 지워진 표정의 흔적은 비 오는 날의 희미한 물자국과 닮아있다.

 

 

그런 거, 당연한 거잖아.”

 

 

입을 열기까지의 간격에 공기를 불어넣었다. 입을 열고, 숨을 토해낸다. 그 순간이 아주 잠깐이나마 오래도록 영원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럴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이 내가, 십대 째가 돌아가시게 가만히 있을 거 같냐?”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이런 종류의 대답을 원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질문에서 비롯된 선택지에 존재조차 하지 않고 시험으로 치자면 완벽하게 논외인 답. 결국 그러한 비참함을 경험해보지 않은 인간만이 오만하게 입에 올릴 수 있는 발언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헤아리면서도 수많은 가능성보다 단 하나의 가정만을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경험해보지 못한 절망만큼 스스로의 무수한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에. 평소보다 크게 뜨인 새카만 눈동자가 생경하게 다가온다.

침묵이 조금 길다고 생각한 순간 웃음소리가 공간을 메웠다. 손을 뻗기만 하면 간단히 닿을 거리에 있는 눈가가 천천히 허물어지면서 언제나의 단정함을 잃는다. 언제까지고 귓가에 머물 것 같은 소음과 꺼지지 않는 풍경 속에서, 계속 될 것만 같은 얼굴이 눈 안쪽에 문신마냥 선명하게 담겼다.

영원히. 감히 그런 세 음절을 붙일 수 있을 것처럼.

 

 

그것 봐.”

 

 

역시 네가 더 낫잖아.

문득 온전하게 맞물린 이 시선 너머를 좀 더 보고 싶어졌다. 거기에도 이런 온도의 색채가 여전히 존재할까. 이렇게나 대화 사이에 공백이 생겼는데도, 아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수없이 많은 감정들과 갈 곳을 헤매는 문장들. 방황하는 내 음성.

 

고쿠데라 하야토는 처음으로 언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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